'겁 없는 소녀'상이 보여준 공공미술의 맛

[조선일보 칼럼] '겁 없는 소녀' 像이 보여준 공공미술의 맛

길거리나 공원의 흉물스러운 조각품을 둘러싼 논란이 우리에게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영국에는 '저게 뭐야(What's That Thing?)' 상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한 해 동안 공공장소에 세워진 조형물 가운데 최악의 것을 선정해 망신 주는 상이다. 시사 주간지 '스펙테이터'가 시민들 이메일 제보를 바탕으로 결정한다. 며칠 전 올해 수상작으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세워진 대형 조각이 뽑혔다. 내려진 평가는 저주에 가깝다. "서툴고, 난폭하고, 싸구려 같고…." 이것도 모자라 "쓰레기 불법투기 죄로 감방에 처넣고 싶다"고 했다.

작년엔 런던 레인파크에 있는 조각이 차지했다. 여기에도 "기괴하고, 안 어울리고, 헷갈리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걸 보면 '공공미술(Public Art)'이란 개념을 처음 만든 나라도 별수 없구나' 싶다. 그러나 놓쳐선 안 될 게 있다. 적어도 영국은 공공 미술품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게 뭐야?' 상을 한국에 수입하면 한 해 상패를 수십 개 준비해도 모자랄 것이다. 거리에, 광장에, 건물 모퉁이에 정체불명의 조각들이 넘쳐난다. 1995~2015년 전국에 1만4996점의 환경조형물이 세워졌고 여기 들어간 돈이 몇조원 된다고 한다. 이 중 제값 하는 게 몇이나 되는지 의문이다. '생명' '가족' '환희' '정(情)' '비상(飛翔)' 같은 제목이 흔히 따라붙는다. 어느 건축가는 "도시를 고물 야적장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세계여성의 날(3월 8일)'을 맞아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한 달 동안 임시로 세워진 '겁없는 소녀상(Fearless Girl)'을 내년 2월까지 볼 수 있게 된다. 사진은 어린이 네 명이 소녀상을 둘러싸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AFP 연합뉴스

공공미술품은 시민의 공감, 주변 환경과의 조화가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 우리의 경우 시민은 배제된 채 공급자의 욕망만 반영한 조각, 그 결과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 모를 조각들이 너무 많다.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에 최근 거대한 황금빛 인체 조각이 들어섰다. 유명 원로 조각가가 기증했다고 한다. 기증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DDP 앞 광장은 사적(私的) 공간이 아니다. 하루 100만명 넘게 오가는 곳의 경관을 결정하는 일에 시민 동의와 전문가 판단을 구하는 절차가 있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광화문 교보문고 옆에 새로 지은 D타워와 KT 신사옥 일대에도 조각들이 들어섰다. KT 신사옥은 파리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렌조 피아노 작품이다. D타워는 젊은이들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조각들은 이런 장소의 미학을 살리지 못한다. 그중엔 동네 어린이 놀이터에서나 봄 직한 것들도 적지 않다.

지난달 뉴욕 월가에 세워진 '겁 없는 소녀' 상(像)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조각이 들어섰을 때 생겨나는 예술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소녀의 표정과 포즈를 흉내내고 사진 찍으며 조각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남성 중심 증권가를 상징하는 황소상에 맞선 130㎝짜리 소녀상이 단번에 도시의 명물로 떠올랐다. 뉴욕시는 1주일로 예정했던 조각 설치 기간을 1년으로 연장했다. "이번 결정은 소녀상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란 뉴욕 시장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시민들은 한발 더 나아가 영구 전시 청원(請願)운동을 벌이고 있다. '저게 뭐지?'가 아니라 '이것 봐라?' 할 만한 조각이면 시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김태익 논설위원

by 독종 | 2017/04/17 14:28 | 좋은 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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